3위 가난한 환자들을 살렸던 한국의 슈바이처
독일 출신으로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평생 헌신!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명언.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참의사가 있었습니다.
설대위 박사의 따스한 인술을 극찬, 병원 밖까지 줄을 선 환자들!!
한국 이름을 가졌으니 실은 미국인이었던 그.
설대위는 한국 이름을 더 사랑하며 일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설대위 박사는 미국 의과 대학에서 수석 졸업을 했고, 미래가 촉망받던 젊은 의사죠. 그런 그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1954년 6.25 전쟁 직후, 당시 한국은 아비규환인 것.
의료인, 병상,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부상, 전염병, 암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때, 그야말로 지옥과도 다름없었을 전쟁 직후의 한국.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이 수없이 많았던 상황. 환자들이 치료비조차 없어서 대신 삶은 감자를 이고 오거나 찐 옥수수를 내미는 경우도 빈번했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기는 커녕 오히려 미소로 화답을 했다고 해요.
치료비에 상관없이 가난한 환자들까지 치료를 해줬고, 당시 병원 인근 한국인들은
미국으로 떠나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한국의 환자들이 눈에 밟혔던 설대위 박사는 정년 퇴임을 할 때까지 일했는데, 196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암 환자 등록 사업을 시작.
구강암을 치료하는 외과 수술, 1960년대 코만도 수술을 최초로 도입했다고 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통받던 한국인들의 진정한 영웅이죠.
조국인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을 했다면 탄탄대로였을 그의 삶,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에 머물기로 결심해 덕분에 우리나라의 의료계도 한층 더 발전했죠.
가난한 환자들에게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줬던 설대위 박사. 말년에 치매를 앓고 삶의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는, 2004년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늘 이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환자는 누가 돌봅니까...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해요.
2위 일제에 저항했던 푸른 눈의 신부들
일제 강점기, 사방이 바다였던 제주도는 커다란 감옥이었죠. 조선인을 향한 수탈과 착취, 민족적 차별은 기본이었습니다. 온갖 공사에 제주 도민들을 강제 동원했죠.
일제는 제주도마저 무서운 속도로 잠식해가고 있었죠. 사회, 경제적 수탈을 일삼던 일본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까지 있었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을 제주 도민들,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한 1930년대 초.
패트릭 도슨, 오스틴 스위니, 토마스 라이언, 3인의 선교사가 제주 땅에 도착했는데
푸른 눈의 신부들에게도 일제의 압박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조선 천주교회를 일본 교회의 일부로 인정받았는데 일본은 천주교마저 일본화하며 모든 사상을 장악하려 시도했죠.
슬픔에 잠긴 제주 도민들을 목격 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뜻을 모은 세 신부. 성당에 걸린 일장기를 떼어내 발로 짓밟았죠. 우리 민족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
신사 참배를 거부하도록 하며 일제에게 신과 다름없던 일본 천황을 거침없이 깎아내리기도 했죠. 조선인 학생 신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계속해서 고취시킴, 일본을 비난하고 패전을 예언했던 세 신부. 일제에게는 성가셨던 눈엣가시.
결국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등의 명목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신부들.
하지만 감옥에서조차 꺾이지 않았던 세 신부의 기개. 그렇게 세 신부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사이, 드디어 해방된 조선.
세 신분가 우리 민족만큼이나 간절히 바랐을 독립. 제주 도민들에게 독립을 향한 의지와 희망을 늘 일깨워줬던 세 신부.
일제 강점기 제주 도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선교사 3인.
푸른 눈의 세 신부는 우리들의 진정한 동지였습니다.
출처: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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